[이데일리 석지헌 기자] 달러 가치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자금력이 부족한 국내 바이오 벤처들이 임상시험에 차질을 빚고 있다.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임상 시작 시기를 미루거나, 해외에서 진행하는 임상 일부를 국내로 바꾸는 등 임상 계획을 변경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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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업계에 따르면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 후보물질을 개발 중인 바이오 벤처 A사는 임상2상을 미국에서 진행하려 했지만, 국내에서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10월 캐나다 보건부에서 임상1상을 승인받은 후 현재 임상 마무리 단계를 밟고 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해외에서 임상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비용 압박으로 국내 진행을 검토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한 바이오 기업 관계자는 “최근 고환율 영향으로 미국 임상 비용이 많게는 20%씩 늘었다”며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해외 임상에 대한 부담이 커져 국내 임상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비상장 바이오 벤처 B사는 알츠하이머 신약 임상1상을 원래 미국이나 호주에서 진행하려 했으나 대외 여건 악화로 동유럽에서 진행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아밀로이드 베타·타우 응집체를 직접 분해하는 저분자화합물 파이프라인을 개발하고 있다. 내년 임상1상 신청이 목표다.
B 업체 임상시험 수탁을 맡은 기업 관계자는 “이 기업은 지난해 펀딩을 많이 받긴 했지만 올해 지출을 줄이는 방법을 고심 중”이라며 “그 중 하나가 미국이나 호주에서 진행하려던 임상을 동유럽에서 진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임상을 진행 중인 또 다른 바이오 벤처 C사는 한 글로벌 CRO 업체와 해외 임상 계약을 맺었으나. 최근 임상 비용이 급격히 늘면서 임상 진행 여부를 다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환율에 따른 해외 임상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국내 임상 비중을 늘리는 곳도 있다. 신라젠은 스위스 바실리아에서 도입한 항암제 후보물질 ‘BAL0891’의 미국 임상1상을 준비 중인데, 미국 뿐 아니라 한국 의료기관에서도 임상을 진행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신라젠 관계자는 “파이프라인 도입을 논의하는 동안 환율이 계속 올랐다”며 “환율이 오른 만큼 임상 비용도 올라서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수입 의존도’ 높은 CRO도 타격시험용 실험 동물을 들여오는 비중이 국내보다 해외가 더 높거나, 임상 장비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부 비임상·동물시험 전문 국내 CRO(임상시험수탁업체)도 고환율 영향으로 영업이익에 타격을 받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이들 기업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물류 비용 증가에 따른 영업손실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내 CRO 관계자는 “동물시험 대행을 주 사업으로 업체들의 경우 외부에서 동물을 수입해오는 비중도 상당해서 환리스크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이라며 “실제 비임상 전문 CRO 업체들 실적을 보면 수입 비중이 높은 기업은 매출 증가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이 생각보다 개선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국내 CRO가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과 같은 고환율 상황은 달러로 거래하는 글로벌 CRO 대신 원화로 거래하는 국내 CRO에게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 CRO는 전문인력·인프라 부족 등으로 글로벌 CRO를 대체할만한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신약벤처들이 초기부터 글로벌 임상을 목표로 진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아직 국내 CRO 업체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인식이 성장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임상시험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인력 부족, 글로벌 국가에서의 경험 부족 등이 국내 CRO 업체에 대한 낮은 신뢰도로 이어지고 있는데 국가적 차원에서도 국내 CRO들과 파트너를 맺고 글로벌 임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책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