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나은경 기자] 이르면 내년 ‘꿈의 기술’인 유전자가위 기술을 활용한 치료제가 시장에 출시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연내 3세대 유전자가위 기술인 크리스퍼/카스9을 적용한 치료제의 시판허가 신청이 이뤄질 예정이다.
첫 유전자가위 치료제의 출시 일정이 구체화되면서 크리스퍼/카스9 원천기술을 가진 툴젠의 특허수익화 시점도 앞당겨진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 이병화 툴젠 대표이사(사진=툴젠) |
|
3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샘 쿨카르니 크리스퍼 테라퓨틱스(CRSP) CEO는 ‘바클레이즈 글로벌 헬스케어 컨퍼런스’에서 연내 CTX001의 의약품허가신청(BLA)을 마치겠다고 밝혔다. 늦어도 내년 말에는 시판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CTX001은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개발 중인 이상혈색소증(TDT, SCD) 치료제다.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태아의 헤모글로빈 수치를 상승시켜 TDT, SCD의 발생 확률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식적으로 CTX001의 BLA 일정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질없이 일정이 진행된다면 CTX001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BLA 단계까지 간 크리스퍼/카스9 치료제가 된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의 BLA 일정이 나온 것은 툴젠에 여러 모로 긍정적인 신호다. 우선 CTX001가 FDA의 심사를 통과하면 크리스퍼/카스9 기술이 실제 치료제에 적용될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진다. 툴젠이 개발 중인 크리스퍼/카스9 기술을 활용한 샤르코-마리-투스병과 습성황반변성 치료제의 상업화에도 속도가 붙을 수 있다.
CVC 특허로 치료제 개발하던 CRSP…상업화 전 툴젠·브로드와 합의해야크리스퍼/카스9 원천기술에 대한 툴젠의 특허수익화 시점도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15년부터 툴젠과 UC버클리대학교·빈대학교·노벨화학상 수상자 에마뉘엘 샤르팡티에로 구성된 ‘CVC그룹’(이하 CVC),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하버드대가 공동설립한 ‘브로드연구소’(이하 브로드)는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원천기술 특허의 최초발명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분쟁 중이다. 지난 2월 미국 특허심판원은 툴젠보다 앞서 진행된 브로드와 CVC의 분쟁에서 브로드의 손을 들어줬다. 이 때문에 CVC로부터 특허를 사와 크리스퍼/카스9 기술을 활용해 온 기업들은 난감한 상황이 됐다. 해당 판결 직후 CVC그룹의 특허로 치료제를 개발하던 크리스퍼 테라퓨틱스와 인텔리아의 주가가 각각 6.4%, 19.2% 하락했을 정도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는 현재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 모두에서 크리스퍼/카스9 유전자 가위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개발된 치료제를 판매하려면 CVC를 이긴 브로드는 물론, 툴젠과도 합의해야 한다. 툴젠의 임시출원일은 2012년 10월23일로 브로드가 특허심판원으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출원일(2012년 12월12일), CVC가 인정받은 최초출원일(2013년 1월8일)보다 모두 앞서있다.
업계에서는 툴젠과 크리스퍼/카스9의 선발명일자를 두고 다투는 CVC, 브로드보다 이들로부터 치료제 권리를 사 온 크리스퍼 테라퓨틱스, 인텔리아의 물밑 합의 의지가 큰 것으로 보고있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연내 BLA를 한다면 약가협상을 위해 이보다 빠른 특허권 합의 진행을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CVC-브로드-툴젠 간 3자합의보다 특허권을 사온 크리스퍼 테라퓨틱스, 인텔리아와의 합의가 먼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다른 증권업계 관계자도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당장 FDA의 의약품허가는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판매가 시작된 후 브로드나 툴젠측에서 특허소송을 제기해 여기서 패소하면 더 큰 손해배상액을 지불해야 한다”며 “이 경우 마케팅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판매 전 특허이슈를 해결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이미 특허권 합의에 대한 윤곽이 잡혔기 때문에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BLA 일정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툴젠 특허권 수익화 앞당겨질까…합의금 예상액만 최소 760억원특허심판에서 툴젠이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예상되는 합의금도 적지 않다. 이병화 툴젠 대표이사는 앞서 연내 3자 합의가 시작돼 내년부터 특허수익화를 통한 매출이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김태희 KB증권 연구원은 “저촉심사에서 툴젠이 시니어파티(Senior Party)로, 브로드와 CVC가 주니어파티(Junior Party)로 지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브로드와 CVC는 자신의 발명이 툴젠보다 빨랐음을 입증해야하는 상황”이라며 “통계적으로 저촉심사에서 시니어파티가 선발명자로 인정받을 확률은 75%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 CVC그룹이 치료제 개발 권리로 발생한 기술이전 계약 (자료=툴젠, KB증권) |
|
CVC는 크리스퍼 테라퓨틱스, 인텔리아, 카리보 바이오사이언스에 크리스퍼/카스9 기술을 이전해 계약금으로 1조5000억원 가량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기업공개(IPO) 당시 툴젠의 투자설명서에는 내년 3사의 특허합의 후 CVC와 브로드가 크리스퍼/카스9 특허권으로 받은 수익의 5%를 툴젠이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배분비율 5%를 토대로 2023년과 2024년 CVC로부터 툴젠이 받을 특허수익금을 추정하면 760억원 정도다.
김 연구원은 “툴젠이 시니어파티로 유리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5%의 배분비율은 보수적 수치”라며 “배분비율을 10%로 가정하면 CVC와 브로드 양사로부터 수취가능한 특허수익금은 약 165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