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왕해나 이광수 기자] 지난 20여년간 국내 대학들은 내로라하는 바이오 기업들을 경쟁적으로 탄생시켰다. 특히 눈에 띄게 많은 학내 바이오 벤처를 배출한 곳으로 서울대와 포항공대(포스텍)가 첫손에 꼽힌다. 이들 대학은 바이오 메카 대학들 가운데 명실상부한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이들 대학의 우수한 인력과 연구비 지원 등은 창업의 씨앗을 틔웠다. 피어난 1세대 바이오 벤처들의 성공은 다시 후속 벤처 창업의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서울대는 학내 바이오 벤처 문화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된다. 이데일리가 국내 10개 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포스텍·카이스트·유니스트·지스트)을 대상으로 교원 창업 바이오 기업과 기술지주 투자 바이오 기업을 분석한 결과, △
헬릭스미스(084990) △
마크로젠(038290) △
셀리드(299660) △
천랩(311690) △
강스템바이오텍(217730) △
고바이오랩(348150) 등 유수의 바이오 벤처가 서울대에서 탄생했다. 김선영 1996년 당시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부 교수가 헬릭스미스(옛 바이로메드)를 창업하면서 학내 벤처의 물꼬를 틔웠다. 국내 바이오 벤처 중 가장 먼저 코스닥에 상장한 마크로젠, 코로나19 백신 개발로 주목받은 셀리드도 모두 서울대에서 시작했다.
포스텍은 전체 교직원 수와 학생수가 종합대학보다 크게 밀리는 불리한 여건속에서도 현재까지 18개 바이오 기업을 탄생시켰다. 포스텍이 길러낸 대표적 바이오기업은 제넥신이다. 성영철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는 지난 1999년 제넥신을 창업, 2009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이후 시가총액 2조원이 넘는 바이오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압타머사이언스(291650)는 2007년 포스텍내 압타머 사업단을 구성해 압타머 기술(특정분야에 특이적으로 결합하는 핵산)을 사업화, 현재는 코스닥 시가총액 1900억원대 업체로 성장했다. 엔비포스텍은 감염성 질환과 심혈관 질환을 고감도로 진단하는 바이오 기술을 기반으로, 한독으로부터 1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현재는 한독이 1대 주주다.
겸직 허용·자금 지원·성공 사례가 ‘키워드’두 대학의 특징은 바이오 산업이 태동하기도 전부터 학내 창업에 따른 겸직 및 휴직을 적극 보장해왔다는 점이다.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 조치법에 따르면 교수는 벤처기업을 창업할 경우 5년 이내로 휴직 및 겸직이 가능하지만, 이를 학내 규정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대는 ‘영리업무 및 겸직 금지에 관한 특례’ 조항을 신설해 교수들의 창업·겸직 활동 제한을 완화하는 등 교수 창업 기반을 확대하고 나섰다. 포스텍 역시 4년 이내로 제한했던 휴직 및 겸직 기간을 최대 3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었다. 창업 가능 대상 기준은 3년 이상 전임 교직원이지만 창업 시 대학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창업대상에 포함할 수 있도록 했다.
지원 형태는 간접 지원에서 직접 자금 지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연구만 해온 교수들이 초기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점을 감안해서다. 서울대는 2008년, 포스텍은 2012년 ‘대학 투자기업’인 기술지주회사 인가를 받아 학내외 벤처에 투자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지원한 주요 바이오 벤처는 각각 14곳, 12곳에 달한다. 고려대 및 고대의료원(32곳) 다음으로 많다. 여기에 서울대는 교수 개인이 아닌 학교가 주도적으로 창업 기술을 발굴·지원하는 기획 창업 프로그램을 확대해 예비창업 단계부터 투자 유치까지 모든 과정을 지원한다. 포스텍은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벤처 펀드를 조성했다. 기업들과 개인 투자자들이 참여해 만든 535억원 규모 펀드는 바이오, 헬스케어, IT 분야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한다.
무엇보다 성공한 벤처가 후배 기업 발굴을 위해 학교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학내 벤처를 이끄는 힘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서울대가 배출한 1세대 바이오 기업 마크로젠은 기업과 학교의 동반 성장을 위해 상장 때 100억원, 이후 50억원을 기부했다. 고광표 고바이오랩 대표 역시 최근 10억원 상당의 주식을 서울대에 내놨다. 코로나19로 자금 유치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생 학내 바이오 벤처는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 3년간 서울대의 창업 사례를 보면 2019년 창업된 21개 기업 중 12개 기업(57%)이 바이오 기업이었고 2019년에는 13개 중 10개(77%), 2020년에는 18개 중 9개(50%)이었다.
포스텍은 ‘제 2의 제넥신’을 만들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2018년 조성한 포스텍 펀드는 성 대표의 100억원 기부가 출발점이 됐다. 성 대표는 지난해에도 100억원을 기부했다. 특히 2016년 설립된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에스엘포젠은 제넥신과 포스텍이 합작해 만든 벤처다. 제넥신이 89.5%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포스텍 관계자는 “제넥신은 포스텍의 창업 생태계 선순환 체계를 이루는 교원 창업 기업의 대표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학내 기술 사업화할 수 있는 징검다리 필요” 다만 학내 벤처가 제넨텍, 모더나와 같은 글로벌 바이오 기업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도 있다. 교수 창업이 성공할 수 있는 투자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창업주가 최고경영자(CEO)를 겸하는 국내 바이오 기업은 기술 상업화 과정에서 임상시험, 제품 개발, 마케팅까지 교수가 도맡는 것이 통상적이다.
여기에 드는 막대한 자금을 대학이 모두 지원할 수는 없는 구조다. 대학은 비영리 교육기관인 만큼 수많은 벤처에 투자할 만큼의 자금력은 갖추지 못했다. 역사가 10여년 남짓인 기술지주회사(산학협력단)도 기술 가치 평가부터 기술이전, 인수합병(M&A) 역량이 아직 낮은 수준이라는 평가다.
서울대 출신으로 지스트 학내 벤처 지놈앤컴퍼니를 이끌고 있는 박한수 대표는 “초기 창업시에는 90% 의 역량이 리서치에 있다면, 후기에는 90%가 개발과 사업화로 넘어가기에 이를 위한 조직과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면서 “3H라고 해서, 힙스터(Hipster. 정보통)인 대표의 연구에서 시작하지만, 개발 실무를 책임지는 해커(Hacker. 시스템 구축자)와 전천후 사업가인 허슬러(Hustler. 부양자)를 어떻게 빠르고 조화롭게 이룰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고 조언했다.
이승규 바이오협회 부회장 역시 “많은 바이오 벤처 지원프로그램이 정부 주도로 이뤄진 탓에, 대학과 기업을 잇는 산학협력단에 기술의 라이선스 인-아웃을 담당할 수 있는 투자 전문가가 거의 없다”면서 “학교에서 기술을 가지고 와서 사업화 과정을 거쳐 기업을 만들던지 벤처를 M&A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