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새미 기자] “
대웅제약(069620)이 ‘메디톡신’의 균주와 기술을 훔쳐 ‘나보타’를 만들었다.”
|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 (사진=이데일리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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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호 메디톡스 대표가 2016년 11월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말을 꺼내면서 국내 보툴리눔 톡신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이듬해
메디톡스(086900)는 대웅제약을 상대로 국내외 소송을 제기했다. 5년 4개월 만에 국내 민사소송에서 메디톡스가 압승하자 업계 안팎에선 다시 정 대표를 주목하고 있다.
흔히 ‘보톡스’로 불리는 보툴리눔 톡신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보툴리눔 균에서 추출한 단백질로, 피부 밑에 극미량을 주입하면 근육이 마비되면서 주름이 펴진다. 보툴리눔 균은 1g만으로도 100만명 이상 죽일 수 있는 맹독이기 때문에 국가 안보 차원에서 균주 관리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앞서 대웅제약은 2016년 4월 보툴리눔 톡신 제제 ‘나보타’를 국내 출시하며, 해당 제제의 균주를 2006년 경기도 용인의 마굿간에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대웅제약과 휴젤은 각각 축사 인근의 흙과 썩은 통조림에서 보툴리눔톡신 균주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며 균주 출처를 명확히 밝히기 위한 공개토론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메디톡스는 2017년 6월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같은해 10월에는 국내 법원에도 민사소송을 걸었다. 2020년 1월에는 메디톡스가 엘러간(현 애브비)과 함께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대웅제약과 대웅제약의 파트너사 에볼루스를 제소했다. 이 중 미국 소송은 2018년 4월 기각됐고, 미국 ITC는 2020년 12월 나보타 수입을 21개월간 금지하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지난 10일에는 국내 민사소송의 1심 결과가 공개됐다. 이날 재판부는 대웅제약의 균주가 메디톡스 균주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메디톡스가 청구한 손해배상액 501억원 중 40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또한 대웅제약이 보유한 균주를 메디톡스에 넘겨주고 이미 만든 완제품과 반제품을 모두 폐기하라고 명했다. 사실상 메디톡스가 완승을 거둔 셈이다. 대웅제약은 즉각 강제집행정지 신청을 내고 항소하겠다는 입장이다.
정 대표는 메디톡스가 소송에서 승리할 것을 자신하며, 국내 보툴리눔 톡신 시장이 균주 출처가 명확한 업체 위주로 정리될 것으로 전망했었다. 그는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의 균주와 전체 제조 공정 기술을 도용한 사실이 명백한 만큼 소송에서 이길 것”이라며 “균주 이슈가 해결이 되면 보툴리눔톡신 시장에는 정직하게 균주를 발견하고 자체 기술로 연구한 제조공정을 가진 기업들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메디톡스가 이번에 완승을 거두면서 국내 보툴리눔 톡신 업계가 대대적으로 재편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에서는 2종류의 균주로 4개사만이 보툴리눔 톡신 상업화에 성공했지만 국내에서는 20여 곳이 균주를 자체적으로 확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중 균주 출처가 명확한 곳은 메디톡스와
제테마(216080)뿐이다. 제테마는 2017년 영국 공중보건원으로부터 ‘ATCC3502’를 라이선스인(기술도입)하고 유전자 서열 정보도 공개했다.
메디톡스는 국내 소송 1심 판결 후 “이번 판결을 토대로 메디톡스의 정당한 권리보호 활동을 확장해 나갈 것”이라며 “보툴리눔 균주와 제조공정을 불법 취득해 상업화하고 있는 기업에 대한 추가 법적 조치를 신속히 검토하겠다”며 줄소송을 예고했다. 앞으로 메디톡스는 소송비 부담을 줄이면서 노련하게 소송전을 이끌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메디톡스는 2021년 8월 해외 로펌 ‘퀸 엠마뉴엘 어콰트&설리번’을 선임했다. 소송비용은 퀸 엠마뉴엘이 부담하고 메디톡스는 승소 시 배상액의 일정 비율만 가져가는 구조인 것으로 전해졌다. 퀸 엠마뉴엘은 지적재산권(IP) 보호와 관련된 세계적 로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간 메디톡스는 각종 소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매년 수백억원대의 소송비용을 지출해왔다. 과도한 소송비 부담으로 인해 2018년까지만 해도 855억원이었던 메디톡스의 영업이익은 2019년 257억원으로 급감하고 2020년에는 371억원 적자를 냈다. 2021년에는 345억원으로 흑자 전환했지만 이는 같은해 9월 엘러간과 파트너십 계약 종료에 따른 수익(약 350억원)이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효과였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304억원을 기록하면서 실적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업계에서는 메디톡스와 에볼루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메디톡스는 해당 판결이 나오기 전인 지난 7일 이사회를 열고 에볼루스 주식 218만7511주를 처분해 232억원을 확보하기로 했다. 에볼루스는 대웅제약의 미국 파트너사로 미국에서 나보타를 판매하고 있다. 메디톡스는 미국 ITC 소송에서 승소한 이후 미국 엘러간, 에볼루스와 3자간 합의 계약을 했다. 이를 통해 메디톡스는 에볼루스로부터 나보타 판매에 따른 로열티를 받아왔다.
업계 관계자는 “메디톡스가 액상형 보툴리눔 톡신의 미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사 제품을 판매하는 에볼루스의 지분을 정리하는 것 아닌가 싶다”며 “국내 소송 승리를 발판으로 미국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이사 약력
△1962년 출생
△1986년 서울대 미생물학과 졸업
△1988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세포생물학 석사
△1992년 KAIST 분자생물학 박사
△1993년 미국국립보건원(NIH) 객원연구원
△1995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원
△1997년 선문대 교수
△2000년 메디톡스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