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정복은 ‘생명의 비밀’을 푸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만큼 어렵고 복잡해서다. 암은 세계 사망률 1위의 질병이다. 2022년 국내 기준으로 폐암(22.3%)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간암(12.2%), 대장암(11.0%), 췌장암(8.8%), 위암(8.6%) 순이었다.
한국은 여전히 암 치료제 변방으로 평가된다. 네이처 인덱스에 따르면 암 연구 분야 압도적 1위는 미국이고 중국, 영국, 독일, 일본이 톱5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은 톱10에 간신히 드는 수준이다. 항암제 승인 수치로 봐도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세계에서 많이 출시되고 있는 신규 유효물질(NAS) 항암제의 경우, 2022년에 총 21개가 출시되었으나 국내에서는 단 한 건도 나오지 못했다. 이데일리는 항암제 가운데 핵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면역 항암제’ 분야의 국내 대표 바이오텍들을 순차적으로 분석한다. [편집자주][이데일리 김승권 기자] 한때 ‘바이오 신드롬’을 이끌었던 신라젠이 면역항암제로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신라젠은 최근 미국 바이오기업 리제네론 면역항암제와 병용 임상에서 효과를 증명했다. 항암바이러스의 한계로 지적돼 온 정맥투여시 효과 저하 문제 해결 실마리를 제시했다는 평가다. 항암 바이러스 플랫폼 기술 ‘GEEV’의 개발도 순항 중이다. 신라젠은 펙사벡-GEEV,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19일 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신라젠은 신장암 대상 ‘펙사벡+리브타요’ 병용임상 결과를 담은 포스터를 지난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유럽종양학회(ESMO)에서 발표했다. 항암제 임상 주요 평가 지표인 전체 생존율(OS)과 무진행 생존기간(PFS) 등에서 유효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펙사벡+리브타요 병용 임상, 주요 지표 OS-PFS 유효성 확인면역항암제의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트렌드는 병용 임상이다. 키트루다와 다수의 항암제의 병용임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대응하기 위해 리브타요 병용임상도 다수 시행되고 있다.
항암바이러스 펙사벡과 면역관문억제제 리브타요 병용 임상 연구는 지난 2017년부터 신라젠과 글로벌 빅파마인 리제네론이 공동 개발 협약으로 시작됐다. 이 임상은 총 89명의 전이성 또는 절제 불가능한 신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 신라젠 정맥주사형 항암 바이러스 연구 결과 자료 (자료=신라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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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젠은 이번 임상에서 약물의 종류와 투약 방식으로 4개의 임상군(A~D군)을 설정했다. 세부 임상군은 A군(펙사벡을 신장암 부위에 직접 투여+리브타요 정맥 투여), B군(리브타요 정맥 단독투여), C군(펙사벡 정맥 투여+리브타요 정맥 투여), D군(기존 면역관문억제제 치료 실패 환자에 팩사백+리브타요 투여) 등이다.
이 중 리브타요 단독투여군인 B군보다 펙사벡 병용투여군인 C, D군에서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 전체 생존율(OS)과 무진행 생존기간(PFS) 등에서도 더 나은 유효성이 입증됐다.
핵심 임상군인 C군의 경우 추적관찰 기간 22.2개월 기준 4개군 중 가장 높은 객관적 반응률(23.3%, 완전관해 1명·부분관해 6명)을 기록했다. D군은 17.9%(부분관해 5명)로 뒤를 이었고, A·B그룹은 13.3%, 12.5%(각각 부분관해 2명)에 그쳤다. A·B의 경우 적은 모수로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핵심 임상군인 C·D군은 통계적 유의성과 유효성을 모두 확인했다. 신라젠이 주장해왔던 펙사벡의 정맥투여 가능성이 입증된 셈이다.
신라젠은 연구 인력을 확충하고 임상에 집중해 발 빠르게 글로벌 빅파마로 기술 이전을 추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신라젠 관계자는 “항암바이러스의 정맥투여에 대해서는 회사가 선진적인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고 자신한다”라며 “신장암 임상 시작부터 리제네론과 긴밀한 협의를 이어온 만큼, 상호 발전적인 방향으로 논의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항암 바이러스 플랫폼 기술 ‘GEEV’...개발 상황은?신라젠의 새로운 항암 바이러스 플랫폼 기술 ‘GEEV(Genetically Engineered Enveloped Vaccinia)’를 적용한 SJ-600의 전임상도 조기 완료됐다. GEEV® Platform기술은 신라젠의 차세대 항암 파이프라인으로 널리 알려진 SJ-600시리즈의 원천 기술이다. GEEV는 항암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선천면역을 회피할 수 있는 기술이란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혈중 항바이러스 물질을 저해하는 보체조절단백질 CD55를 바이러스의 외피막에 직접 발현하도록 설계해 정맥으로 투여해도 항암 바이러스가 생존하게 되고, 더 많은 항암 바이러스가 종양에 도달해 높은 항암 효능을 발휘한다. 또한 플랫폼 기술로서 암 치료 효능을 상승시킬 수 있는 복수의 치료 유전자를 탑재할 수 있다. 전임상은 서울대 의대에서 다양한 암종의 이종이식 동물모델을 통해 진행됐고 상반기 논문으로 발표된 바 있다.
| 신라젠 항암 파이프라인 현황 (사진=신라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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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젠 관계자는 “항암 바이러스가 종양 세포를 선택적으로 감염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맞지만, 혈액 내에서 중화항체나 보체의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암세포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멸하는 한계가 있었다”며 “SJ-600을 투여했을 때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는 형성됐지만, 바이러스가 암세포를 감염시키고 사멸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중화항체에 대한 내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반복해서 투여해도 여전히 항암 효과가 있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상장 폐지 위기서 부활한 신라젠...그간 히스토리 보니2006년 설립된 신라젠은 한때 시가 총액이 셀트리온에 견줄 만큼 주목받던 기업이다. 2014년 ‘펙사벡’이라는 면역항암제 후보물질 개발사를 인수했고, 2016년 기술력을 인정받아 코스닥 시장에 상장됐다. 2016년 12월 상장 직후 1만원대였던 주가는 2017년 11월 24일 15만원 2300원까지 오르며 ‘바이오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다.
항암제 펙사백(JX-594)은 미국 토머스 제퍼슨 대학교 연구실에서 개발됐다. 악성 흑색종 환자들을 대상으로 첫 임상시험이 진행되며 기대감이 증폭됐다. 펙사백의 가능성을 알아본 제네렉스(Jennerex)가 펙사백의 라이선스를 인수하여 1상, 2상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2014년 3월 제네렉스를 인수한 때부터, 신라젠의 사실상 거의 유일한 파이프라인(신약 프로젝트)은 펙사벡이었다.
| 신라젠 사옥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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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신라젠은 다른 제약회사와 다르게 대부분 임상을 미국인 전문가들이 맡고 있어 더 신뢰가 높았다. 실제 신라젠 임원 중 다수는 미국 암젠 등에서 근무한 바이오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글로벌 파트너사, FDA(미국 식품의약국), EMA(유럽 의약품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성공을 할 수 있는 신약개발 사업이기에 신라젠은 한국 토종 제약회사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을 것이라 예상됐다.
큰 기대를 모으던 이 회사의 주가가 폭락한 건 2019년 8월 개장 직전 신라젠이 “미국 데이터모니터링위원회(DMC)로부터 개발 중인 신약 ‘펙사벡’의 간암 임상3상 시험 중단 권고를 받았다”고 공시하면서다. 이후 일부 투자자들이 신라젠 매도에 나서면서 주가가 4거래일 연속 급락했다. 2019년 7월 3조5899억원이었던 신라젠 시가총액은 8월 1조409억원으로 70% 넘게 감소했고 주가는 8000원대까지 떨어졌다. 이후 대표 배임 혐의까지 겹치며 주식은 더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 리제네론과의 임상 효과 증명으로 펙사벡의 재평가가 시작됐다는 의견이 나온다. 신라젠은 당시 펙사벡의 실패 원인이 임상 디자인에 있다고 판단하고 임상 3상부터는 디자인을 바꿨다. 대장암을 대상으로 임상이 진행되는 동시에 신장암에서도 효능 실험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