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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훈의 신약개발 서랍장②]가깝고도 먼 R과 D

  • 등록 2026-08-31 오전 7:00:05
  • 수정 2026-08-31 오전 7:00:05
장성훈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글로벌규제컨설팅사업단 단장 (사진=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장성훈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글로벌규제컨설팅사업단 단장 (사진=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장성훈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글로벌규제컨설팅사업단 단장]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 1년 차를 시작했을 때 내가 잘 따르던 박사과정 선배가 있었다. 세 살 위였으니 존경했다기보다는 좋아하고 의지했던 선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당시 내 책상 바로 옆에는 실험실 전화기가 있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었고, 20~30명이 북적이는 실험실에 전화는 한 대뿐이었다. 자리가 바로 옆이었던 나는 거의 모든 전화를 받았다. 그 중 가장 자주 걸려온 것은 그 선배의 남자친구 전화였다. 과장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그의 전화를 1000번은 받아준 것 같다.

그 선배를 최근 다시 만났다. 오래 전 실험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한국의 신약개발 현실로 화제가 옮겨갔다. 선배는 한국 제약사 중에는 여전히 R&D의 R과 D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인력을 배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연구(Research)와 개발(Development). 우리는 두 단어를 붙여 ‘R&D’라고 부른다. 너무 자주 붙여 쓰다 보니 한 몸처럼 느껴지지만 신약개발에서 R과 D는 가깝고도 먼 사이다.

Research 출발점에는 질문이 있다. “이 물질이 특정 질병에 효과가 있을까?” “이 단백질을 차단하면 암세포 성장을 막을 수 있을까?”

연구자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한다.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가설을 바꾸고 다시 실험한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 의미 있는 신호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 연구의 중요한 역할이다. 연구에는 창의성과 호기심, 남들이 보지 못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신약 후보물질은 이런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

그러나 좋은 후보물질을 발견했다고 신약개발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출발선에 선 것에 가깝다.

Development는 연구에서 발견한 가능성을 실제 의약품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질문이 달라진다. “사람에게 투여해도 안전한가?”, “어떤 용량으로 얼마나 자주 투여해야 하는가?”, “매번 같은 품질의 약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가?”, “환자에게 나타난 효과가 우연이 아니라 약에 의한 것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FDA를 비롯한 규제기관이 이 자료를 신뢰하고 허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연구가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라면 개발은 그 가능성을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증거’로 바꾸는 일이다. 한 연구실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얻는 것과 여러 국가의 수십 개 병원에서 일관된 임상시험 결과를 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논문에 실린 그래프 하나만으로 신약을 허가받을 수는 없다. 독성시험, 임상약리, 임상시험, 통계, 제조·품질관리, 허가 전략 등 수많은 조각이 맞아야 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부족하면 개발 전체가 멈출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발이 연구가 끝난 뒤 진행되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는 점이다. 개발 역시 오랜 경험과 훈련이 필요한 전문 영역이다. 뛰어난 연구자가 반드시 뛰어난 개발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연구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유연함이 중요하다. 예상 밖의 결과도 새로운 발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반면 개발에서는 목표와 경로를 미리 정하고 정해진 기준에 따라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축적해야 한다. 수백 명의 환자가 참여하는 임상시험에서는 결과를 확인한 뒤 가설이나 평가 방법을 유리하게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뛰어난 공격수가 반드시 뛰어난 골키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 선수 모두 축구를 잘 알아야 하고 같은 승리를 향해 뛰지만 역할과 필요한 훈련은 다르다. 공격수를 골키퍼 자리에 세워놓고 “같은 축구선수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말할 수는 없다. R과 D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많은 후보물질이 실험실에서는 놀라운 효과를 보이지만 실제 신약으로 허가받는 후보물질은 극히 일부다. 사람에게서 효과가 충분하지 않거나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약효는 좋지만 대량생산이 어렵거나 임상시험 설계가 적절하지 않아 효과를 증명하지 못하기도 한다.

후보물질 과학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발 전략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FDA에서 근무할 때 좋은 과학적 아이디어를 가진 개발사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FDA 질문에 답할 자료가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회사는 “우리 약은 분명히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지만 FDA가 판단하는 것은 회사 확신이 아니라 제출된 증거다.

반대로 개발 경험이 풍부한 회사는 연구 단계부터 훗날 규제기관이 어떤 질문을 할지 생각한다. △필요한 독성시험은 무엇인지 △상업생산이 가능한 제조공정을 어떻게 준비할지 △임상시험에서는 어떤 환자를 대상으로 무엇을 측정할지를 미리 계획한다. D는 R이 끝난 뒤 갑자기 시작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연구와 개발 사이에 높은 담을 쌓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두 영역을 구분하는 목적은 서로를 떼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연결하기 위해서다. 연구자는 후보물질의 특성과 한계를 개발팀에 정확히 전달하고 개발 전문가는 임상과 허가에 필요한 증거가 무엇인지 연구 단계부터 조언해야 한다.

따라서 뛰어난 연구자에게 아무런 준비 없이 개발 전체를 맡기거나 개발 경험이 없는 사람을 필요에 따라 임상·허가 부서에 배치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전문성의 문제다. 역할을 바꿀 수는 있지만 새로운 역할에 필요한 교육과 경험을 쌓을 시간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오래전 우리 실험실의 전화기는 한 대뿐이었다. 누구에게 걸려온 전화든 내가 먼저 받아 해당 사람에게 연결해줬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그 전화기는 실험실 사람들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신약개발에도 R과 D를 연결하는 통로가 필요하다. R만으로는 흥미로운 논문에 머물 수 있고, D만으로는 개발할 혁신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훌륭한 연구가 훌륭한 개발을 만나야 비로소 하나의 약이 돼 환자에게 도달한다.

두 글자를 붙여 쓰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두 역할까지 하나로 뭉뚱그려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R&D에 투자하겠다”거나 “R&D 인력을 늘리겠다”는 말을 들으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어디에 투자한다는 것인가? 연구에? 개발에?”

“어떤 인력을 늘린다는 것인가? 가능성을 발견할 사람인가, 아니면 그 가능성을 환자에게 전달할 사람인가?”

R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D는 그 가능성을 환자에게 전달한다. 꼭 연결돼야 하지만 둘은 분명히 다르다. 신약은 그 둘이 제대로 만나는 곳에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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