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송영두 기자] 한미약품(128940)이 비만 신약 후보물질 하나로 1억9000만달러(약 2850억원)의 선급금을 확보하며 국내 제약·바이오 기술수출 역사를 다시 썼다. 2015년 한미약품이 사노피에 3개 후보물질을 기술이전하며 받은 4억유로(당시 약 5000억원) 이후 11년 만에 가장 큰 선급금이다. 특히 복수 후보물질을 묶었던 당시와 달리 이번에는 단일 후보물질 하나로 확보한 역대 최대 규모 선급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 | 임주현 한미그룹 부회장(사진=한미그룹) |
|
이번 성과 이면에는 한미약품이 오랫동안 추진해온 비만 신약 프로젝트 ‘H.O.P’(Hanmi Obesity Pipeline)가 있다. 창업주인 고(故) 임성기 회장 별세 이후 경영권 분쟁 등으로 그룹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임주현 한미그룹 부회장이 주도적으로 디자인한 H.O.P 프로젝트 중심을 잡고 개발을 이어온 끝에 글로벌 빅파마 제넨텍을 상대로 3조5000억원 규모 기술수출 성과를 만들어냈다.
2015년 글로벌 기술수출 신화를 썼던 한미약품이 11년 만에 차세대 비만 신약으로 다시 한번 대형 계약을 성사시키며 신약개발 명가의 존재감을 입증했다는 평가다.
3개 물질로 받았던 5000억, 단일 파이프라인으로만 2850억 24일 한미약품은 로슈그룹 자회사 제넨텍과 비만 및 제2형 당뇨병, 심혈관질환 등 대사질환 치료제 후보물질 ‘HM17321’(UCN2 유사체)에 대한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계약 규모는 최대 23억달러(약 3조5000억원)다. 제넨텍은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HM17321의 개발·제조·상업화 독점 권리를 확보한다. 한미약품은 반환 의무 없는 선급금으로 1억9000만달러(약 2850억원)를 받고 향후 임상 개발과 규제 승인, 상업화에 따른 단계별 마일스톤과 제품 판매에 따른 별도 로열티를 수령한다.
최대 23억달러 총 계약규모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이 1억9000만달러의 선급금이다. 기술이전 총액은 임상 개발과 품목허가, 상업화 등 단계별 조건을 모두 달성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이다. 반면 반환 의무가 없는 선급금은 계약 체결 자체로 확보하는 현금이다. 기술을 도입하는 글로벌 제약사가 현시점에서 후보물질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계약금 규모로 보면 2015년 한미약품과 사노피 계약 이후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라며 “당시 사노피 계약은 후보물질 3개를 묶은 계약이었던 반면 이번 계약은 HM17321 단일 후보물질에 대한 계약이다. 단일 후보물질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 계약금”이라고 말했다.
2015년 한미약품은 사노피에 지속형 당뇨 신약 ‘퀀텀 프로젝트’를 총 39억유로(당시 약 4조8000억원)에 기술이전했다. 계약과 동시에 받은 선급금만 4억유로(약 5000억원)에 달했다. 다만 당시 퀀텀 프로젝트에는 에페글레나타이드를 비롯한 3개 후보물질이 포함됐다.
이번에는 임상 1상 단계의 HM17321 하나만으로 1억9000만달러를 확보했다. 제넨텍이 아직 초기 임상 단계인 단일 후보물질에 약 2850억원의 현금을 선지급한다는 점에서 HM17321의 기술적·상업적 잠재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국내 바이오기업들이 글로벌 빅파마와 잇달아 조 단위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했지만 선급금 규모를 비교하면 이번 계약 무게는 더욱 두드러진다.
리가켐바이오는 2023년 항체약물접합체(ADC) ‘LCB84’를 존슨앤드존슨(J&J) 자회사 얀센에 최대 17억달러(당시 약 2조2000억원)에 기술이전하면서 선급금 1억달러(약 1300억원)를 확보했다. 오름테라퓨틱 역시 2023년 BMS에 표적단백질분해(TPD) 기술을 적용한 후보물질을 기술이전하면서 1억달러(약 1300억원)의 선급금을 받았다.
에이비엘바이오가 2025년 GSK와 체결한 혈액뇌장벽(BBB) 셔틀 플랫폼 ‘그랩바디-B’ 기술이전 계약은 최대 20억6300만파운드 규모였지만 선급금은 3850만파운드(당시 약 740억원)였다. 한미약품이 올해 일라이릴리와 체결한 기술이전 계약도 총액은 12억6000만달러(약 1조9000억원)에 달했지만 선급금은 7500만달러(약 1130억원)였다.
수조원에 달하는 총 계약규모와 달리 실제 계약과 동시에 지급하는 선급금이 1000억원을 넘어서는 사례 자체가 많지 않은 셈이다. HM17321의 선급금 2850억원은 리가켐바이오-J&J 계약 약 2.2배, 한미약품-릴리 계약 약 2.5배에 달한다.
역대 최대 기록 역시 한미약품이 갖고 있다. 2015년 사노피와 체결한 퀀텀 프로젝트 계약의 선급금 4억유로(당시 약 5000억원)다. 당시에도 선급금 규모만으로 글로벌 의약품 기술거래 시장 최상위권에 올랐다. 결국 11년 동안 국내 기업들이 잇달아 조 단위 기술수출에 성공했지만 계약 체결과 동시에 2850억원 이상의 현금을 확보한 사례는 나오지 않았던 셈이다.
비만 신약으로 범위를 좁히면 한미약품은 자신의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한미약품은 2015년 비만·당뇨 치료제 HM12525A를 얀센에 총 9억1500만달러(당시 약 1조원)에 기술이전하면서 1억500만달러(당시 약 1216억원)의 선급금을 받았다.
이번 HM17321 계약은 총 계약규모가 23억달러로 당시보다 약 2.5배, 선급금은 1억9000만달러로 약 1.8배 커졌다. 국내 기업이 자체 개발한 비만 신약을 글로벌 빅파마에 직접 기술이전한 계약 가운데 총 계약규모와 선급금 모두 최대 규모다. 11년 전 국내 비만 신약의 글로벌 기술수출 기록을 만들었던 한미약품이 다시 자신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경영권 분쟁에도 지켜낸 H.O.P, 임주현 리더십 결실 이번 기술수출의 또 다른 의미는 HM17321의 탄생 과정에 있다. HM17321은 단독으로 추진된 프로젝트가 아니라 한미약품이 차세대 비만치료제 시장을 겨냥해 구축해온 H.O.P 프로젝트 핵심 파이프라인 중 하나다.
H.O.P는 6개 후보물질로 구성된 한미약품의 차세대 비만 신약 프로젝트다. 기존 GLP-1 계열을 넘어 비만 환자의 다양한 치료 수요를 공략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기전의 후보물질을 구축하는 전략이다.
HM17321은 이 가운데 비인크레틴(non-incretin) 계열 UCN2(Urocortin-2) 유사체다. 기존 GLP-1 기반 비만치료제가 체중을 크게 줄이는 대신 근육을 포함한 제지방량까지 감소시킬 수 있다는 한계를 겨냥했다. 체지방은 선택적으로 줄이면서 근육량과 근기능을 보존하거나 개선하는 계열 내 최초(First-in-Class) 신약을 목표로 한다.
업계에서는 H.O.P 프로젝트 설계와 개발 과정에서 임주현 부회장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임성기 회장 별세 이후 경영권 분쟁 등 여러 상황이 있었지만 신약개발이라는 한미약품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연구개발을 이어온 결과”라며 “H.O.P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임주현 부회장이 중심을 잡고 프로젝트를 끝까지 가져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번 계약이 단순한 기술수출을 넘어 임성기 회장 이후 한미약품의 차세대 연구개발 리더십을 보여주는 성과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업계 관계자는 “임성기 회장 재임 당시 한미약품이 2015년 사노피·얀센 등 글로벌 빅파마와 연이어 대형 기술수출 계약을 성사시키며 국내 신약개발 산업의 전환점을 만들었다”며 “이번 기술이전 계약은 창업주 별세 이후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최대 성과다. 앞으로 임 부회장의 리더십이 부각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