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유림 기자] 최근 한 바이오기업은 이전과 같이 표면이자율 및 만기이자율 0% 이자로 100억원대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금융당국의 리픽싱(Refixing, 전환가액 조정) 규제를 앞두고 기관투자자들이 리픽싱을 삭제하고, 이자를 훨씬 높인 전환사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A벤처캐피탈은 지난해 0% 이자로 100억원 규모 전환사채를 투자하면서 주식전환 옵션 1주당 1만원으로 계약했다. 1년이 지나고 상장사는 주당 2만원으로 올랐고, 벤처캐피탈은 기존 계약대로 1주당 1만원에 매입, 주당 1만원의 차익을 시현했다. 하지만 리픽싱 상한 규제가 시행되면 전환 가능한 주식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 (그래픽=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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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이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메자닌에 대한 규제를 예고했다. 기관투자자를 규제하고, 개인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행하는 제도지만, 중소 바이오기업들에게 불똥이 튀고 있다. 바이오업계는 CB 리픽싱 개정 시행을 앞두고 벌써부터 자금줄이 막히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1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주가가 오를 경우 전환가를 최초 전환가액까지 상향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최대주주의 CB 콜옵션 행사시 최대주주 지분율만큼만 인수하도록 제한할 예정이다. 즉 리픽싱 악용을 겨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대표적인 리픽싱 악용은 CB를 확보한 기관투자자들이 고의적으로 악재 루머를 퍼뜨려 주가를 급락시키는 등 인위적인 주가 조정 이후 리픽싱으로 지분을 대량 확보하는 사례다. 소액주주들은 과도한 전환가액 조정으로 지분 희석과 주가 하락 피해를 입게 된다. 무자본 인수합병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다만 일부의 악용 사례를 막기 위한 강력한 규제가 오히려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을 막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오랫동안 이익이 나지 않는 특성이 있는 바이오산업에서는 벌써부터 투자 유치 어려움을 체감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익명을 요구한 A바이오사 CFO(최고재무책임자)는 “바이오는 이익이 당장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주가 업사이드를 보고 CB 투자를 들어간다. 상한 리픽싱이 시행되면 기관투자자는 CB 투자의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기관들이 리픽싱 개정 초창기에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면서 섣불리 투자에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우리도 상반기 자금 조달을 생각한 것보다 많이 했다”고 말했다.
B바이오사 CFO는 “투자기관과 애널리스트를 만나면 실적 나오는 곳만 찾고 있으며, 바이오는 실적이 안 나오니까 투자 계획을 다 접은 상태다. 최근 규제 전에 CB 투자 미리 받으려다 투자에 실패한 바이오기업 직접 들은 곳만 3개나 된다”며 “다른 업종보다 바이오산업에는 정말 큰 악재다. 금융당국에 중소 바이오텍 투자를 오히려 막는 규제라는 이의신청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업계는 코로나 이후 정상화될 때까지 만이라도 유예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C바이오사 CFO는 “주변 CFO 모두 리픽싱 규제를 앞두고 걱정이 많다. 말로만 바이오 지원을 확대한다고 하지 말고, 현장에서 체감하는 어려움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며 “개정이 안 되면 가장 베스트지만 이미 정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는 유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르겠다. 리픽싱을 악용한 곳을 잡아내는 게 금융당국에서 할 일이지 자꾸 산업을 옥죄고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리까지 인상되면 한동안 바이오업계에 보릿고개가 직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은행은 이달 중 기준금리 인상이 유력한 상황이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오는 2023년 중 두 차례 기준금리 인상이 예상된다. 자산운용사 대표는 “기준금리 인상이 본격화되면 위험자산인 CB 시장에 돈이 안 들어온다. 리픽싱 규제까지 하면 투자는 급격하게 위축될 것”이라며 “코로나 치료제와 백신 실패 등 악재로 인해 바이오에 관심까지 멀어지면, 자금 조달 미리 못 한 바이오기업은 정말 힘들 거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