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나은경 기자] “국내에선 쉽게 볼 수 없던 글로벌 빅파마의 임원이 아시아 의료 데이터에 관심을 보이며 협업을 요청하더라고요. 글로벌 제약산업에서 아시아의 의료데이터에 대한 수요가 크니 미개척지인 이 분야를 에비드넷이 잘 다루면 의료계 미충족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달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바이오USA’를 다녀온 에비드넷의 우현기 데이터사이언스그룹 그룹장과 전진용 사업개발팀 리더는 지난 9일 경기 판교에서 이데일리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글로벌 제약사가 한국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하려 한다면 어느 지역, 어느 병원에 특정 질환 환자가 많은지를 비롯해 기본적인 의료데이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전 아시아에서 에비드넷 규모의 표준화된 의료데이터를 가진 데이터 기업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바이오USA에서 글로벌 빅파마들이 다양한 기초 의료 데이터를 보유한 에비드넷을 주목한 이유다.
| 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바이오USA’ 한국관에는 에비드넷 부스가 세워졌다. 부스를 둘러보는 참관객들에게 에비드넷의 기술을 설명하는 우현기 데이터사이언스 그룹 그룹장(왼쪽)과 전진용 사업개발팀 리더(왼쪽). (사진=에비드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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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설립된 에비드넷은 의료데이터 플랫폼 기업으로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올해 바이오USA에 참가했다. 에비드넷의 ‘피더넷’(Feedernet)은 서로 다른 국내 병원 의료데이터를 표준화하고 데이터망을 구축해 국내외 다양한 분야 연구개발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플랫폼이다. 지금까지 국내 전국 상급·종합병원 50여곳의 환자 6000만명으로부터 나온 300억건의 데이터를 토대로 네트워크가 구축됐다(중복데이터 포함).
의료 빅데이터는 디지털헬스케어 산업이 유연하게 흐르도록 돕는 바퀴와 같은 존재다. 조인산 에비드넷 대표는 “의료 데이터를 활용해 서비스를 만들고 해당 서비스 위에서 고객데이터가 창출되면 그로 인해 서비스가 더 정교화되는 선순환이 이뤄진다”며 “이 같은 ‘데이터 휠’이 만들어지는 데 에비드넷의 데이터가 씨앗의 역할을 하고 있고, 데이터 휠이 필요한 다른 기업도 돕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헬스케어에서 의료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시장 성장세도 매섭다. 시장조사업체 모도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20년 기준 237억4900만달러(약 31조원) 수준이었던 글로벌 헬스케어 데이터 산업은 오는 2026년까지 584억400만달러(약 76조원) 규모로 급격한 성장이 예상된다.
현장에서도 코로나19 이후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의료 데이터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높아졌음을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전 리더는 “실무단에서 느끼기에 파트너십, 협업요청이 올 들어 많이 늘었다”며 “코로나19 이후 제약사나 대중의 의료 데이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공동데이터모델(CDM) 데이터 기반 연구협력증진 협약이 체결된 병원의 CDM 데이터셋을 통해 특정 질환에서 어떤 계열의 약물처방 건수가 더 높게 나타나는지 확인하고 비교할 수 있다.
피더넷으로 전처리 과정을 거친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는 2018년까지만 해도 70여개 수준에 불과했지만 3년 만에 네 배 이상 늘어 지난해에는 280개에 육박했다. 피더넷을 통한 데이터 분석 건수도 누적 1만3000회가 넘는다.
조 대표는 “미국은 데이터 기반 연구를 도울 수 있는 회사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이런 움직임이 더딘 상황”이라며 “글로벌 빅파마 입장에서 신약개발을 할 때 미국은 데이터로 선명하게 윤곽이 그려지는데 아시아에는 시장을 조망해줄 내비게이션이 없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같은 수요를 위해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도 갖고 있다. 조 대표는 “코로나19로 잠시 중단됐지만 중국, 일본에서 의료기관의 데이터 표준화를 위한 사업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반대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도 에비드넷을 통해 미국 제약사의 의료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다.
분산형 데이터망인 피더넷은 표준화된 데이터를 한 곳에 모으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가 생성된 각 병원에 그대로 두면서 통계적 분석결과만을 제공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개별환자의 정보에 접근하지 않고 의료정보도 병원 밖으로 반출하지 않으면서 많은 연구자가 여러 병원의 의료 통계데이터를 공동활용할 수 있어 안전하다.
사업이 진행될 경우 국내에서 분산형 데이터망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에비드넷이 아시아 각지의 현지 데이터기업보다 경쟁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이 회사측 설명이다. 한 의료기관의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나면 그 다음 의료기관의 데이터를 표준화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노동집약적이고 많은 시간이 필요해 분산형 데이터망을 만드는 일은 진입장벽이 높다. 우 그룹장은 “일본도 10년전부터 MID-NET(메디컬 인포메이션 데이터베이스 네트워크) 표준화 시도를 했지만 489만명에서 멈춰 현재 지지부진한 상황”이라며 “에비드넷이 가진 의료데이터 규모의 10분의 1 수준인 셈”이라고 말했다.
일본 JMDC도 헬스케어 데이터 사업을 하고 있지만 직장보험조합에 보험비 청구를 위해 낸 진료비명세서 데이터가 사업의 기반이다. 이 때문에 데이터의 다양성 측면에서 의료기관의 EMR을 표준화해 생체신호정보, 의료검사결과 데이터 통계를 보유한 에비드넷과 비교하면 부족한 점이 있다. 에비드넷이 가진 분산형 데이터망도 JMDC에는 없다.
전 리더는 “미국은 여러 원천기술과 데이터가 자유롭게 유통되기 때문에 토대 자체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면서도 “한국 일부 병원은 미국보다도 전자의무기록(EMR)이 먼저 보급됐을 만큼 장기 데이터가 잘 갖춰져 있다. 단지 그 데이터들이 표준화돼 있지 않아 자유로운 활용에 어려움을 겪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에비드넷을 통해 데이터를 표준화하면 디지털헬스케어를 위한 토대를 빠르게 갖출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조 대표는 “EMR 구축률이 90%를 넘는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디지털 생태계가 빠르게 갖춰질 토양을 갖춘 곳”이라며 “에비드넷은 기존에 수십억원이 들고, 수십년이 걸릴 신약개발 연구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촉매이자 신약개발사와 병원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윤활유가 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