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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제약·바이오 업계가 이재명 정부의 ‘상법 개정’에 따른 집중투표제 도입을 앞두고 선제적 보호장치 마련에 몰두하고 있다. 집중투표제로 소수주주 추천 인사의 이사회 진입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기업들은 이들 ‘야당 사외이사’ 선임에 맞서 거물급 방패를 속속 내세우는 모습이다.
 | | 서울 여의도 FKI회관에서 진행된 개정 상법으로 달라질 주주총회, 기업의 우회전략 vs 일반주주의 대응전략 세미나에서 구현주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가 발언 중이다. (사진=김윤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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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급’ 무기 든 개미들… 집중투표제 의무화의 습격 1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정기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를 골자로 한 2차 상법 개정안을 선제적으로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특히 K-바이오 기업들의 뛰어난 성과 속에서 ‘자산 2조 원’이라는 ‘대규모 상장법인’ 규제의 문턱을 새로 넘은 기업들이 대거 늘어나면서, 이사회 주도권을 사수하려는 사측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올해 주총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집중투표제다. 올해 9월 시행을 앞둔 2차 상법 개정안에 따라 자산 2조원 이상의 대규모 상장회사는 향후 정관으로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그동안 국내 제약사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정관에 “본 회사는 집중투표제를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자물쇠를 채워왔으나, 2차 상법 개정안에 따라 이 자물쇠가 강제로 철거된 셈이다.
집중투표제는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1주당 이사 수만큼의 투표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이사 3명을 선출할 때 100주를 가진 주주는 총 300표를 갖게 되며, 이를 특정 후보 한 명에게 ‘몰빵’할 수 있다. 소수주주들이 연합하여 특정 후보에게 표를 집중시킬 경우, 대주주가 선호하지 않는 인물이라도 이사회에 입성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주가 하락이나 경영진의 실책에 불만을 품은 소액주주 연대나 행동주의 펀드들에게는 경영진을 견제할 가장 강력한 실력 행사 수단이 생긴 것이다.
“검사장부터 식약처장까지”… 이사회 전면 배치된 ‘거물급 방패’ 이사회의 빗장이 풀리자 제약사들은 ‘전문성’과 ‘권위’라는 두꺼운 방패를 들고 나왔다. 소수주주가 추천한 인사가 집중투표로 입성하더라도 이사회 내에서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면, 누가 봐도 압도적인 경력을 가진 인물을 사외이사로 배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한양행(000100)은 검사장 출신인 오인서 전 수원고검장을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 후보로 내세웠다. 수사 및 법률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앉혀 주주 제안이나 감사의 날카로운 칼날에 법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포석이다. 유한양행은 역대 최대 실적을 바탕으로 전년 대비 배당 규모를 확대하는 등 주주들의 표심 잡기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는 규제 기관 수장이었던 이의경 전 식약처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이는 백신 및 신약 개발의 인허가 전문성을 높이는 목적도 있지만, 주주들이 전문성 부족을 이유로 이사회를 공격할 명분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GC녹십자(006280) 역시 사노피 대표 출신의 박기환 교수를 영입하며 글로벌 실무형 방패를 구축했다. 특히 녹십자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대상을 확대하는 정관 변경을 통해 ‘법보다 앞서가는 투명성’을 강조하며 명분을 선점하고 있다. 종근당 역시 이번 주총에서 거물급 사외이사 인선을 통해 이사회 독립성 강화와 경영권 방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와 셀트리온(068270) 역시 이번 주총에서 정관 변경을 통해 거버넌스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정관 제29조에 명시된 집중투표 배제 조항을 삭제하기로 했으며, 셀트리온은 사외이사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하고 감사위원 분리선출 인원을 확대하는 등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지배구조를 갖추는 데 집중하고 있다.
대웅제약·HK이노엔, ‘2조 클럽’ 가입과 동시에 맞이한 규제의 파도 대웅제약(069620)과 HK이노엔(195940)도 새롭게 ‘자산 2조원’ 제약기업에 이름을 올리며 집중투표제 대상에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웅제약은 국산 신약 펙수클루와 보툴리눔 톡신 나보타의 글로벌 흥행에 힘입어 별도 재무제표 기준 자산 2조원 시대를 열었다. HK이노엔 역시 위식도역류질환 신약 케이캡의 전 세계적인 확장세와 수액제 사업 호조로 덩치가 커지며 ‘대규모 상장법인’ 타이틀을 달게 됐다.
대웅제약의 경우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통해 자산 규모를 정교하게 관리해 왔으나, 글로벌 매출 급증으로 인해 더 이상 ‘2조원의 벽’을 피할 수 없게 됐다. HK이노엔 역시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중을 50% 이상으로 높이고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정비하는 등 급격한 체질 개선에 나선 상태다.
제약사들이 단순히 법령에 따라 정관만 고치는 것은 아니다. 업계에선 기업들이 집중투표제의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시차 임기제’를 적극 활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사들의 임기 만료 시점을 분산시켜 한꺼번에 선출하는 이사 수를 줄이면, 소액주주들이 표를 몰아줄 대상이 적어져 집중투표제의 효과가 급감하기 때문이다.
또 기업들이 이번 3월 주총에 사활을 거는 배경에는 올해 하반기 시행되는 ‘합산 3% 룰’이 자리 잡고 있다. 개정 상법에 따른 감사위원 분리선출 시,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모두 합쳐 3%로 제한하는 이 규정은 9월 이후 소집되는 주총부터 적용된다.
이번 3월 정기주총까지는 대주주가 계열사 지분을 쪼개서 각각 3%씩 의결권을 행사하는 ‘지분 쪼개기 방어’가 가능하다. 대웅제약이나 HK이노엔 등 신규 진입 기업들에게는 대주주의 영향력이 그나마 온전하게 작동하는 이번 주총이 우호적인 감사위원을 선임해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내년 주총부터는 소액주주 측 후보의 이사회 진입을 막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제약업계에선 그동안 창업주 혹은 총수 일가 중심의 경영 색채가 짙었던 제약기업들이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로 거버넌스의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반대급부에선 신속한 투자가 생명인 바이오 산업에서 이사회의 갈등이 경영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