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나은경 기자] 삼성그룹 출신 인력들이 빠른 속도로 바이오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나면서 이른바 ‘바이오 삼성사단’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전에는 LG화학(LG생명과학)이 ‘K-바이오 사관학교’ 역할을 도맡아 1세대 바이오 창업 붐을 이끌었다. 하지만 최근 LG그룹이 바이오 투자에 주춤하는 사이 과감하게 바이오 사업을 키워온 삼성그룹이 그 자리를 신속하게 대체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출신, K-바이오 요직으로 속속 이동
| 삼성 출신 바이오 주요 인력 (자료=각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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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지난 5월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에서 글로벌 BD전략팀장 및 글로벌 영업센터 상무를 역임한 양은영 팀장이
차바이오텍(085660) 전무(CBO·Chief Business Officer)로 자리를 옮겼다. 양 전무는 차바이오텍, 차백신연구소, CMG제약 등 차바이오그룹의 사업개발 후보물질의 기술수출과 기술도입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차바이오텍이 삼성 출신 인재를 영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차바이오텍은 미국 자회사인 마티카바이오테크놀로지의 대표로 송윤정 이뮨온시아 CEO를 영입했다. 송 대표는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바이오로직스의 전신인 삼성종합기술원(삼성종기원)에서 바이오신약 개발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전임 대표인 소병세 현 마티카홀딩스 대표도
삼성전자(005930) 반도체사업부에서 20여년간 근무하며 부사장까지 오른 ‘삼성맨’이었다.
지난달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근무한 40대 이원직 롯데지주 ESG 경영혁신실 상무가 롯데바이오로직스의 첫 대표이사로 선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미국 제약사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에 일하며
셀트리온(068270) 위탁생산(CMO) 프로젝트의 품질 부문을 맡았다. 2010년에는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 등을 거치며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론칭을 도왔다. 이제 막 바이오산업에 뛰어든 롯데는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 진출을 결정하며 업계 최대 CDMO 생산규모를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출신 인물을 대표로 낙점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8월 롯데지주 임원으로 영입된 이 대표는 이후 삼성바이오로직스 핵심부서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여러 차례 스카웃했다고도 알려졌다.
국내 인공지능(AI) 신약개발 선두업체 스탠다임의 김진한 대표이사도 삼성종기원 출신이다. AI 전문가인 김 대표는 종기원 재직시절 프로젝트를 하며 만난 송상옥 최고운영책임자(COO)와 윤소정 최고연구책임자(CSO)와 함께 종기원을 나와 2015년 스탠다임을 설립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개발본부장을 지낸 최창훈 전 부사장도 지난해 회사를 나와 메신저리보핵산(mRNA) 기반 항체신약 개발사인 드노보바이오테라퓨틱스를 세웠다. 면역진단 업체
프리시젼바이오(335810)의 김한신 대표도 삼성바이오에피스 출신이며 이 회사의 박종면 최고기술책임자(CTO), 이승훈 최고재무책임자(CFO) 역시 모두 삼성 출신이다.
삼성바이오 출신들은 이밖에 투자업계로도 뻗어나가고 있다. 신한금융투자는 지난해 삼성바이오에피스 인력을 제약바이오 담당 애널리스트로 영입했고, 투자은행(IB) 부문 바이오산업분석 인력으로도 뽑았다.
“다양한 경험이 ‘삼성출신’ 강점…활약 거세질 것”
| 왼쪽부터 송윤정 마티카바이오 대표, 최창훈 드노보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 김진한 스탠다임 대표 (사진=각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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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바이오벤처 창업의 산파 역할은
LG화학(051910)(옛 LG생명과학)이 주도했다. LG화학이 1979년 충남 대덕연구단지 내 설립한 바이오텍연구소가 특히 많은 역할을 했다. LG에서 나와 바이오기업을 창업한 이들의 수만 50여명에 달한다.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의 김용주 대표이사,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288330)의 이정규 대표이사,
펩트론(087010)의 최호일 대표이사,
알테오젠(196170)의 이정진 대표이사,
파멥신(208340)의 유진산 대표이사,
수젠텍(253840)의 손미진 대표이사가 대표적이다. 바이오텍에서 고위임원으로 일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100여명을 훌쩍 넘는다.
반면 삼성은 LG보다 20년가량 늦게 바이오사업에 진출했다. 1999년 삼성은 그룹 내 연구개발(R&D) 허브 역할을 하는 삼성종기원에 ‘바이오랩’을 만들고 연구자 100여명을 뽑았다. 이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10년 ‘비전2020’에서 바이오를 5대 신수종사업으로 꼽은 뒤 삼성바이오로직스 및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설립하면서 삼성의 바이오 사업은 CDMO와 바이오시밀러를 주축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바이오산업에 대한 LG그룹의 동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어 업계에서는 향후 삼성 출신들의 활약이 더 두드러질 것으로 본다. LG화학은 IMF 외환위기 직후 제약바이오사업을 LG생명과학으로 분사해 수익극대화를 중심으로 사업전략을 수정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벌였다. 이후 2017년 LG화학이 다시 LG생명과학을 흡수통합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지난 5월 밝힌 중장기 계획에서도 바이오 혁신신약 개발에 대한 LG그룹의 투자금액은 향후 5년간 1조5000억원이었다. 같은 기간 삼성(바이오·반도체·AI 등 신사업에 450조원), SK(바이오에 12조7000억원)가 바이오에 투자하려는 규모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바이오 분야에서 삼성인재들이 두각을 보이면서 바이오업체마다 삼성출신들을 영입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근 핵심인력 유출이 지속되자 롯데바이오로직스로 이직한 직원들을 상대로 영업비밀침해금지 및 전직금지 가처분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LG화학 출신 1세대 바이오기업인들은 신약 R&D 분야에 특화된 경우가 많았다”며 “R&D 중심이던 K-바이오가 하나의 산업으로 도약하면서 글로벌 임상이나 CDMO 경험이 있는 삼성그룹 출신 바이오기업인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