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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새미 기자] 내수 중심으로 정체됐던 일본 제약사들이 외부 기술 도입에 적극 나서면서 다시 성장 궤도에 올랐다. 현재 기술이전(L/O)에만 집중하고 있는 K바이오에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의 반열에 올라서기 위한 미래 성장 경로를 보여준다는 평가다.
日 제약사, 주로 CVC 통해 간접적 기술 도입 최근 전통적인 빅파마 외에 일본 제약사들도 기술도입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임상개발·허가·판매까지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면서 자본력을 바탕으로 외부 기술을 적극 흡수하기 시작한 것.
이러한 기술 도입 움직임은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이 무렵 일본은 약가 인하 정책이 반복되면서 제네릭(복제약)만으로는 성장에 한계를 체감하는 시기였다. 이에 일부 제약사들은 외부 신약 기술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연구개발(R&D) 전략을 전환시켜 성장을 이어가는데 성공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에서 1세대 제약사들은 거의 다 망했지만 다케다제약 등 일부 제약사들은 기술이전 수익을 통해 인큐베이팅에 나서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업계 분석에 따르면 일본 제약사는 직접적인 기술도입보다는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설립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술에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 직접 기술을 사오는 것보다는 해외 바이오벤처에 자본을 투자해 파이프라인을 간접적으로 확보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는 일본 제약사의 특성과 맞닿아있는 투자 방식이라는 게 업계 평가다. CVC를 통해 소규모 투자를 한 뒤 오랫동안 기술 검증한 후 기술 도입, 제후, 인수 등으로 이어지는 방식이 일본의 보수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부합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일본 제약사는 계단식 성장보다는 베이비스텝식 성장(Baby-step growth)을 선호한다. 한꺼번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거나 곧바로 공격적 M&A에 나서기보단 장기적 안목에서 초기 투자부터 집행하다 추가 투자에 나서는 편이다.
특히 글로벌 R&D 네트워크의 중심지인 미국에 CVC를 설립해 기술 탐색과 학습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단순한 자금 투자가 아니라 현지 유망 기술과 인재를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서도 미국 현지에 CVC를 두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일본 제약사들은 글로벌 혁신의 흐름을 빠르게 포착하며 기술 도입할 만한 파이프라인을 검증할 수 있다.
 | | [그래픽=이데일리 김정훈 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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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자이는 2019년 8월 미국 케임브리지 소재 CVC인 에자이 이노베이션(Eisai Innovation, Inc.)을 설립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5년간 30개사 이상에 투자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에자이 이노베이션은 주로 신약 플랫폼, 디지털헬스·인공지능(AI), 디지털치료제(DTx) 등의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노약품은 20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오노 벤처 인베스트먼트(Ono Venture Investment, Inc.·OVI)를 설립해 미국·유럽의 초기 바이오텍에 투자하고 있다. 2023년 12월에는 펀드 규모를 1억달러에서 2억달러로 증액했으며, 올해에는 미국의 하니스 테라퓨틱스(Harness Therapeutics), 영국의 알키맵(Alchemab) 등에 잇따라 투자했다.
OVI는 지난해 4월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본사를 둔 디사이페라(Deciphera)를 24억달러(3조4300억원)에 인수한 뒤 오노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시키면서 2020년 5월 승인된 위장관기질종양 치료제 ‘킨락’(QINLOCK)을 포함한 키나아제(Kinase) 억제제 플랫폼을 흡수했다. 지난 2월 디사이페라를 통해 인수한 키나아제 억제제 ‘롬빔자’(Romvimza)가 증상성 건활막거대세포종(TGCT) 치료제로 FDA 승인을 받으면서 상용화 파이프라인이 더 늘어났다.
미국에서도 세계 최대 생명과학·바이오 혁신 허브로, MIT·하버드·브로드연구소 등 첨단 연구기관과 수천개의 스타트업이 밀집해 있는 보스턴은 일본 제약사들이 CVC 거점으로 선호하는 곳 중 하나다. 신약개발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서 전략적 가치를 지닌 투자 허브로 손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쓰비시다나베 제약의 CVC인 MP 헬스케어 벤처 매니지먼트(MP Healthcare Venture Management·MPH)는 미국 보스턴에서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씨드~초기 단계 투자를 펼치고 있다. 보스턴과 유럽의 초기 바이오벤처에 분산 투자를 통해 플랫폼이나 신규 모달리티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츄가이제약도 2023년 7월 미국 보스턴에 CVC로 츄가이 벤처 펀드(Chugai Venture Fund, LLC·CVF)를 설립했다. 약 2억달러 규모로 운용되는 해당 펀드는 지난해 1월부터 본격적인 투자 활동을 시작했으며, 미국·유럽과 일본의 신약개발 스타트업을 눈여겨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제약사들은 CVC를 통해 해외 바이오텍에 먼저 자본을 집행해두고,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길 때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기술도입하거나 지분을 키우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며 “보스턴 바이오벤처 중 상당수는 일본계 투자자, 이사가 포진해 있을 정도”라고 언급했다.
K바이오에 주는 교훈? K바이오가 일본 제약사들의 기술도입 사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뭘까. 우선 기술이전이나 자체 신약 개발로 글로벌 임상개발, 허가, 시판에 이르는 경험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신약후보물질을 도입하더라도 글로벌 상용화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도입은 단순히 계약을 맺는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임상·허가·판매까지 이끌어갈 역량이 전제돼야 한다”며 “냉정하게 말해 아무리 좋은 신약후보물질을 들여와도 글로벌 상용화 경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기술 도입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러한 신약 개발과 상용화에 대한 인프라뿐 아니라 얼마나 해당 기술을 내재화할 수 있는지에도 달려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도입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자기 기술로 소화하느냐에 달려있다”며 “외부 기술을 단순 도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량과 응용을 통해 재탄생시켜야 한다”고 제언했다. 기술도입을 단기적인 밸류업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다는 내재화, 응용을 통해 기술 자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예를 들어 다케다제약은 모레큘러 템플릿으로부터 도입한 ETB 플랫폼을 자체 항암 파이프라인에 접목해 독자 기술로 발전시켰고, 에자이는 미국·유럽의 AI 신약개발 스타트업 기술을 자사 항암제·치매치료제 개발 라인에 적용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으로 성장한 제약·바이오기업이 후발 바이오벤처 기술 투자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업계 관계자는 “다케다나 다이이찌산쿄 등 일본의 선두 제약사들은 후발 바이오벤처의 성장과 기술 생태계 강화에 재투자하며 일본 제약 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며 “우리나라에선 유한양행(000100)이 오픈이노베이션에 적극적이지만 다른 대형 제약사나 바이오기업이 나서는 사례는 드물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이 기술도입에 나서기엔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진단도 내놨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도입이 성공하려면 도입하는 기업의 임상개발·상업화 역량이 전제돼야 한다”며 “특히 잉여현금흐름(FCF)이 정착되면서 회사에 여유자금이 쌓여야 되는데 아직 그 정도 단계에 들어선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