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진호 기자]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불허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처방없이 경구용 사전피임약을 판매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미국 식품의약국(FDA)도 최근 접수된 무처방 사전피임약에 대한 승인 신청 건을 심사하는 중이다. 이에 따라 국내외 무처방 피임약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낙태권 폐지 반대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내 몸에서 낙태금지법을 치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제공=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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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A에 날아든 무처방 피임약 승인 요구...“논쟁 재점화”지난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지했고, 그 허용 권한을 각 주로 넘겼다. 이에 따라 무처방 사전 피임약 판매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는 모양새다.
경구용 피임약은 크게 사전 피임약와 사후 피임약으로 나뉜다. 사전 피임약은 생리주기에 영향을 주는 복합호르몬제로 성관계 이전에 복용한다. 반면 사후 피임약은 성관계 후 급한 상황에서 쓰는 고용량의 호르몬제다. 미국에서는 혈전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전 피임약의 경우 처방이 있어야만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11일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을 종합하면 프랑스 HRA파마가 FDA에 자사의 무처방 경구용 사전 피임약에 대한 승인 신청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가던트 헬스 역시 같은 내용의 신청서를 내년에 제출할 예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프레데릭 웰그린 HRA파마 최고혁신적략책임자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낙태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있은 지 몇 주 만에 무처방 사전 피임약에 대한 승인 신청서를 제출한 것은 ‘정말 슬픈 우연의 일치’”라며 “피임약이 낙태에 대한 솔루션은 아닐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어 “통상적으로 FDA의 심사는 약 10개월간 진행된다.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조 바이든 행정부도 낙태권 축소 판결에 대응하기 위해 경구용 사전피임약의 처방 및 판매를 면책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바이든 정부가 경구용 사전피임약을 처방한 의료진과 이를 판매한 약국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선제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피임약이 출혈유발?...美 관련 협회 “충분히 안전하다”FDA는 지난 2011년 16세 이하 청소년에 대한 무처방 사전피임약의 판매를 승인했지만, 연방법원이 이를 기각했다. 당시 법원 측은 사전피임약이 예기치 않은 출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무처방 사전 피임약에 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HRA파마는 미국 내 출산 건강을 위한 비영리 단체 ‘아이비스 리프로덕티브 헬스’(IRB)와 협력해 청소년의 신체에 일정량의 사전 피임약이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며 법적 다툼을 해오는 상황이다.
피임약 관련 업계나 학계에서도 1960년대 나온 1세대 사전피임약은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 등 여러 호르몬들이 고용량으로 포함돼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생리주기와 임신에만 영향을 주는 저용량의 프로게스테론 단일제가 두루 개발했다고 설명한다.
이번에 HRA 파마가 이번에 FDA에 승인 신청한 사전 피임약도 이 같은 단일제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의학협회(AMA)와 미국산부인과학회(ACOG) 등이 모두 사전피임약이 일반 의약품으로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ACOG 소속의 조나스 스와르츠 듀크대 교수는 “경구용 피임약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안전한 것으로 평가된다”며 “사용전 간단한 온라인 설문 조사 방식으로 자신에게 적합한 약물을 선별해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사전·사후 관계 없이 피임약 무처방해야 실질적 효과 있어”세계적으로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대응책 마련은 끊임없는 논쟁거리다. 미국 내에서 사전피임약을 무처방으로 판매하게 될 경우, 각국에서 모든 피임약에 대한 일반판매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사전피임약은 처방없이 구매할 수 있지만, 사후피임약은 처방이 필요하다.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고용량의 호르몬으로 이뤄진 사후피임약을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이후 빠르게 먹어야 효과가 좋다”며 “성관계가 확실히 있었는지 밝히길 꺼리는 당사자의 심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의사의 진단을 받고 이를 먹으라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무엇보다 보통 한밤중에 이 같은 약물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다음날 의사의 진단을 받고 복용하면 효과도 크게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모든 피임약의 위험이나 사용 방법에 대한 확실한 교육이 더 필요한 것이지 처방이 중요한 게 아니다”며 “한국 역시 사후 피임약에 대한 무처방 판매 논의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2021년 국내 경구용 피임약 시장은 380억원 안팎이다. 해당 시장은 아이슬란드 알보젠의 ‘머시론’과 화이자의 ‘에이리스’, 국내 동아제약의 ‘멜리안’과 ‘마이보라’, GC
녹십자(006280)의 ‘디어미순’ 등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피임약 관련 업계 관계자는 “피임약에 들어가는 호르몬의 양은 줄이면서 같은 효과를 내는 약물들이 나오고 있다”며 “관련 규제에 대한 재논의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피임약의 도움을 받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