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장성훈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글로벌규제컨설팅사업단 단장 (사진=이데일리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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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훈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글로벌규제컨설팅사업단 단장]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KoNECT)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글로벌 규제업무를 담당하는 국내 임상시험수탁기관(CRO)의 고위 관계자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규제업무는 흔히 RA(Regulatory Affairs)라고 부른다. 업무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이를 담당하는 부서나 직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RA는 규제기관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하고, 신약 개발 과정에서 필요한 규제전략을 수립한다. 규제기관과 기업을 연결하는 공식적인 소통 창구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신약을 개발하는 기업이라면 가장 중요한 상대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다.
그 관계자와 글로벌 규제업무 교육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규제업무는 대표적으로 현장에서 배우는 일인 것 같습니다. 실제 문제가 닥쳤을 때 고민하고 해결하면서 경험을 쌓아가야 하니까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요. 연애를 글로 배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주 적절한 비유였다.
연애를 배우려는 사람도 제각각이고, 그 사람이 사랑하게 될 상대 역시 모두 다르다. 성격도 다르고, 두 사람이 만난 상황이나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도 다르다. 연애의 원칙을 책으로 배울 수는 있지만, 책에 적힌 대로 한다고 모든 연애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규제업무도 마찬가지다.
물론 반드시 알아야 할 법과 규정이 있다. FDA가 발간한 수많은 가이던스도 읽어야 한다. 임상시험계획(IND)은 어떻게 제출하고, 임상시험은 어떤 기준으로 설계하며, 신약허가신청(NDA)에는 어떤 자료가 포함돼야 하는지도 배워야 한다. 이런 기초지식 없이 규제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렵다.
미국 일부 대학에는 규제과학이나 규제업무를 가르치는 석사과정과 전문 교육과정도 있다. 그러나 관련 과정을 이수했다고 해서 곧바로 복잡한 글로벌 규제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의는 지도 읽는 법을 알려줄 수 있지만, 실제로 길을 걷는 것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미국에 본부를 둔 규제업무 전문가 단체 RAPS(Regulatory Affairs Professionals Society)가 운영하는 RAC(Regulatory Affairs Certification)도 있다. 의약품 분야의 RAC-Drugs와 의료기기 분야의 RAC-Devices로 나뉘는 전문자격으로, 일정한 규제 관련 실무 경력을 갖춘 사람이 시험을 통해 취득한다. 규정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실제 상황에 이를 적용하고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도 평가한다. 단순히 강의를 듣고 받는 수료증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런 자격을 준비하는 과정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분야를 공부하고, 흩어져 있던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만 자격증이 모든 실무 역량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시험에서 주어진 사례를 분석하는 것과 자료도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회사의 개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RAC는 전문성을 판단하는 의미 있는 근거이지만, 모든 상황의 해결 능력을 보증하는 증서는 아니다.
나는 FDA에서 20년 동안 수많은 IND와 NDA를 검토했지만 완전히 똑같은 제출자료를 본 기억이 없다. 같은 암 치료제라도 작용기전과 환자군이 다르고, 예상되는 부작용과 임상시험의 목적도 다르다. 어떤 신약은 독성시험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어떤 신약은 제조와 품질이 발목을 잡는다. 임상시험 결과는 좋아 보이지만 분석방법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약효는 분명해 보여도 적절한 투여용량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IND와 NDA에는 저마다의 사정과 문제가 있다. 사람마다 성격과 사연이 다르듯 신약 후보물질도 각기 다른 특성과 개발 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FDA 가이던스에 모든 문제의 답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가이던스는 규제기관의 일반적인 원칙과 기대사항을 설명하지만 실제 개발 현장의 문제는 교과서의 예제처럼 깔끔하지 않다.
FDA가 “충분한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일까. 추가시험을 해야 할까, 아니면 기존 자료를 다른 방법으로 분석해 설명할 수 있을까. FDA의 우려를 받아들여 개발계획을 바꿔야 할까, 아니면 과학적 근거를 들어 회사의 입장을 설득해야 할까.
규정만 읽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RA 담당자는 문제가 생겼을 때 관련 규정을 찾아 전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FDA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 뒤에 어떤 우려가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회사가 확보한 자료와 부족한 자료를 구분하고, 개발팀과 함께 실행 가능한 대응방안을 찾아야 한다. 때로는 요구를 받아들이고, 때로는 대안을 제시하며, 필요하다면 과학적 근거를 갖고 설득해야 한다.
이러한 판단력은 강의 몇 번으로 생기지 않는다. 제출자료를 준비하고,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고, 답변을 작성하고, FDA와의 회의를 경험하면서 조금씩 쌓인다. 일이 예상대로 풀린 경험뿐 아니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일정이 지연된 경험에서도 배운다. 왜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떤 자료를 먼저 준비했어야 했는지 되돌아볼 때 다음 대응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다양한 경험은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한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며 후보물질의 초기 개발부터 허가까지 함께하는 경험은 대단히 소중하다. 자신이 내린 판단이 몇 년 뒤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회사가 그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발 중인 후보물질이 많지 않거나 특정 개발 단계에 집중된 회사에서는 5년, 10년을 RA로 근무해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가 제한될 수 있다.
이런 경우 이직도 역량을 넓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초기 임상개발을 경험한 사람이 허가신청을 준비하는 회사로 옮기면 새로운 종류의 문제를 만난다. 한 질환에 집중했던 사람이 다른 치료영역을 맡거나 작은 바이오기업에서 일하던 사람이 여러 국가의 허가를 관리하는 회사로 옮겨도 마찬가지다. 이전 회사에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방식이 다른 곳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유를 배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직 횟수가 아니라 무엇을 맡고 어디까지 책임져 보았느냐다. 여러 회사를 거쳤어도 비슷한 업무만 반복했다면 경험의 폭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한 회사에서도 여러 프로젝트와 개발 단계를 맡으며 깊고 넓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이직은 그런 기회를 넓히는 수단 중 하나다.
회사 입장에서 유능한 직원이 오래 남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어렵게 키운 인재가 떠나면 당장 업무에 공백이 생긴다. 그러나 산업 전체의 글로벌 규제 역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재의 이동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한 회사에서 쌓은 경험이 다른 회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 새로운 경험을 더한 전문가가 다시 다른 프로젝트를 이끌 수 있다. 다양한 상황을 경험한 RA 인력이 늘어나면 기업들도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적합한 인재를 찾기 쉬워진다. 오늘 우리 회사가 떠나보낸 사람이 다른 곳에서 성장하듯, 우리 회사도 다른 조직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규제기관과 기업 사이의 인력 이동도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조직의 업무와 책임은 상당히 다르다. 심사하는 입장에서는 자료가 부족한 이유를 지적할 수 있지만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그 자료를 어떻게 확보할지까지 결정해야 한다. 반대로 개발 현장의 어려움을 안다고 해서 심사에 필요한 과학적 근거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FDA를 떠나 기업에서 일하면서 이러한 차이를 실감했다. 심사 경험은 큰 자산이었지만 그것만으로 개발 현장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회사의 시간과 자원 안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일은 새롭게 배워야 했다.
비밀유지와 이해충돌 관리 등 필요한 원칙을 지킨다는 전제에서 이러한 인력 이동은 서로의 판단과 제약을 이해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규제기관 경력이 기업의 실무 능력을 자동으로 보증하지 않듯 기업에서의 경험만으로 심사업무를 모두 이해할 수도 없다. 다른 자리에 가서 다시 배우는 과정 자체가 전문성을 넓히는 것이다.
결국 교육과 자격, 현장 경험은 서로를 보완한다. 좋은 교육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자격시험은 지식을 점검하게 해 주며, 실제 업무는 그 지식을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좋은 선배와 멘토도 필요하다. 답을 대신 주는 사람보다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이 중요하다.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대개 조금 웃는다. 사랑에 관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실제 연애는 상대를 만나 대화하고, 때로는 오해하고 화해하면서 배워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규제업무도 다르지 않다. 강의에서 원칙을 배우고 자격시험으로 지식을 확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FDA의 질문 앞에서 판단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법은 결국 현장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