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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출도 페스트도 없다”는 러… 28세 연구원 의문사에 번지는 판도라 상자

  • 28세 여성 연구원 실험실 시험관 깨뜨린 뒤 숨져… 사인은 여전히 ‘원인불명 폐렴’
  • 크렘린궁 “가짜뉴스 믿지 말라” 일축 속 현지 기사·지자체 경고문 잇단 삭제 의혹
  • 美 “유전체 분석 끝냈을 것” 은폐 의구심… WHO “페스트 아니라면 진짜 사인 뭔가”
  • 등록 2026-10-11 오후 11:54:59
  • 수정 2026-10-11 오후 11:54:59
[이데일리 유진희 기자] “추측과 소문에 귀 기울이지 말고 정부 공식 발표를 신뢰해야 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이 전 세계 언론을 향해 내놓은 일갈이다. 치명적인 고위험 병원체를 연구하던 20대 여성 연구원이 실험 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한 지 일주일이 훌쩍 넘었지만, 러시아 정부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믿으라’는 말에 갇혀 있다. 정작 그 연구원의 목숨을 앗아간 병원체가 무엇인지는 베일에 싸여 있어 국제사회의 의구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이야기의 발단은 지난달 25일(이하 현지시간) 시베리아 바이칼호 인근에 위치한 ‘이르쿠츠크 시베리아·극동 페스트 방역 연구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을 포함해 치명적인 병원체를 다루던 연구원 다리야 시필로바(28)는 살아 있는 병원체가 든 시험관을 다루다 바닥에 깨뜨렸다.

사고 이틀 뒤인 27일부터 호흡 곤란 등 이상 징후가 나타났고, 29일 병원에 입원했으나 증세는 급격히 악화했다. 그는 결국 이달 2일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사망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일주일 남짓이었다. 호흡기 비말을 통해 전파되며 치료 시기를 놓치면 수일 내 사망에 이르는 ‘폐렴형 페스트’의 전형적인 임상 경과와 일치한다는 지적이 쏟아진 배경이다.

그러나 러시아 보건당국인 소비자권리보호복지감독청(로스포트레브나드조르)의 대답은 명료하지 않았다. 공식 사인으로 발표된 병명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중증 폐렴’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사망자의 유해와 검체에서 연구소가 다루던 고위험 병원체가 검출되지 않았고, 페스트균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실험실 내 병원체 누출 사고는 없었으며, 격리 및 관찰 대상자 약 200명 중 코로나19와 리노바이러스 감염자만 각 2명씩 나왔을 뿐 추가 감염은 전무하다고 못 박았다.

러시아의 ‘통제된 안도감’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공기는 정반대로 흘렀다.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에 따르면 인근 바이칼스크시 당국은 “셸레호프시에서 페스트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비공식 정보가 있으니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경고문을 소셜미디어 텔레그램에 올렸다가 2시간 만에 돌연 삭제했다.

이어 모스크바의 ‘채널 5’, ‘REN TV’, 유력 일간지 ‘코메르산트’ 등 러시아 주요 언론에서 페스트 관련 기사들이 줄줄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현지 매체에서 ‘두 번째 사망자가 나왔다’는 보도까지 전해지며 정보 차단과 공포는 국경을 넘어 번졌다.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 분자진단 및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수천 건의 검사를 거친 러시아 당국이 아직도 균주 유전체 분석을 끝내지 못했을 리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시절 백악관 공중보건 당국자를 지낸 라지 판자비 박사는 “이미 정밀 검사를 마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결과를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우려를 낳는다”고 꼬집었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러시아 측의 투명한 정보 공유를 강하게 압박하고 나섰다. 마리아 밴커코브 WHO 유행병·팬데믹 관리 책임자는 “페스트가 사망 원인에서 최종 배제됐다면 실제 사인을 촉발한 병원체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도 “국제보건규칙(IHR)에 따라 잠재적 공중보건 위험을 평가하려면 제때 온전하고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WHO는 초기 위험평가에서 러시아 전역의 확산 위험을 ‘낮음’으로 분류하면서도, 러시아가 정보를 온전히 제공하지 않아 독립적인 정밀 위험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분명히 했다.

러시아가 위험 병원체 연구 시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을 지키는 사이, 생물학적 안보를 둘러싼 불신과 음모론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형국이다. 투명한 데이터 공개 대신 “믿으라”는 크렘린궁의 권위적 해명이 오히려 국제사회의 의혹을 키우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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