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지완 기자] 대한민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자랑하는 ‘보툴리눔 톡신(일명 보톡스) 생산 기술’이 국가핵심기술에서 해제될 위기에 놓였다.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국내 바이오산업 자산을 외국 자본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것이며, “기술 주권 포기이자 이완용급 매국 행위”라는 격한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보툴리눔 톡신은 1g만으로 수천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강력한 신경독소다. 톡신은 미용뿐만 아니라 치료 목적의 바이오의약품으로도 활용된다. 이 때문에 보툴리눔 톡신 생산 기술은 균주 확보부터 배양, 정제, 제제화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극도의 기술력과 보안이 요구된다. 정부는 지금까지 보툴리눔 톡신 생산 기술을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 보호해왔다.
 | 우리나라는 13개 분야 76개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 관리 중이다. (제공=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산업통상자원부, 국가정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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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보툴리눔 톡신 생산 기술은 일부 톡신 업체들의 로비 속에 국가핵심기술 해제 절차를 밟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전문위원회 오는 25일 ‘보툴리눔 톡신 국가핵심기술 지정 해제’와 관련한 2차 의견발표를 앞두고 있다.
현 상황은 관련협회를 등에 업은 해제 찬성파들의 뜻이 관철되고, 톡신 업계 전체 입장으로 포장돼 신임 산업통산자원부 장관 주제 회의 안건으로 상정될 것이란 전망이다.
톡신 해제 주장, 기술 몰이해에서 비롯 우선, 일각에서 주장하는 보툴리눔 톡신을 국가핵심기술에서 해제 사유가 중대 오류를 안고 있다. 첫 째는 다른 국가핵심기술은 모두 ‘기술’인데 보툴리눔 톡신만 기술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보툴리눔 톡신은 단순 유체물로 기술이 될 수 없단 입장이다.
 | 국가정보원에서 공개한 76개 국가핵심기술 목록이다. 이중 생명공학 분야엔 보툴리눔 독소제제 생간기술을 포함 총 4개 기술이 지정됐다. (제공=국가정보원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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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은 홈페이지에 76개 국가핵심기술 목록을 공개하고 있다. 생명공학 분야엔 총 4개 기술이 지정돼 있고, 이중 하나가 ‘보툴리눔 독소제제 생산기술(보툴리눔 독소를 생산하는 균주 포함)’이라고 명시돼 있다. 균주를 포함한 보툴리눔 생산기술 전반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놨단 얘기다. 일각에서 주장한 ‘단순 유체물’이란 표현은 잘못됐다.
두 번째는 톡신 생산 기술이 1940년대에 처음 공여됐고 1980년대 대부분 특허가 만료됐다고 주장한다. 현 시점에서 보면 중급기술로, 기술가치가 크게 떨어졌다고 평가절하했다.
업계 관계자는 “균주에서 보툴리눔 톡신을 분리하는 공정 기술은 논문에 일부 공개가 된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상업화를 위한 균주 배양, 정제, 제제화 기술은 공개된 바가 없다. 상업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톡신 기업에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이는 일부 사실과 왜곡된 정보가 섞인 디스인포메이션(disinformation)”이라며 “진위 파악을 어렵게 만들어 정책 혼선을 주려는 시도”라고 꼬집었다.
보툴리눔 균주는 혐기성 세균으로 산소에 매우 민감하다. 완벽한 무산소 환경 구축이 필수다. 균주 자체가 맹독성 신경독소를 생산하기 때문에 배양 실수는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독소 생산량은 배지, 조성, 온도, pH, 세대 등 배양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최적 수율을 배양하기 위한 제어와 관리 기술은 고난이도 기술이다.
정제 기술 역시 고난이도 기술로 분류된다. 보툴리눔 독소는 단백질 복합체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불순물 제거가 핵심이다. 문제는 정제 과정에서 독소가 쉽게 변경, 분해되기 때문에 난이도 높은 제어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 설명이다.
제제 기술 역시 진입 장벽이 높은 기술로 평가받는다. 보툴리눔 톡신은 열, 빛, 진동, 수분에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동결건조를 거친 분말 제형은 제조 기술 난이도가 높고, 액상제형은 안정성 유지 기술이 수반된다.
‘흔한 기술’ 주장은 허구…상업용 생산국은 7개국뿐 세 번째 오류는 무기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업계 고위관계자는 “과거 미·소 등 강대국은 이를 생물무기로 개발해 실제 실험까지 진행한 사례가 있다”며 “무기화가 ‘불가능한 기술’이 아니라 ‘어려운 기술’일 뿐, 충분한 자금과 의도를 가진 주체에 의해 개발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런 위험성으로 세계보건기구(WHO),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보툴리눔 톡신을 생물테러 1급 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네 번째 오류는 14개국 50개 이상의 기업과 기관에서 생산기술, 균주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법으로 보호할 기술가치(또는 희소성)가 없단 주장이다.
톡신 업체 대표는 “연구용 균주와 생산기술과 상업용 균주와 생산기술은 완전히 별개”라며 “일정 수율을 담보할 수 있는 상업용 균주와 해당 생산기술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다”며 일각의 주장에 선을 그었다. 이어 “연구용 A형 균주는 너무 흔하다”며 “매년 수십 개씩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연구용 균주인 보툴리눔 A형과 B형은 스웨덴 예테보리 균주은행(CCUG), 미국 표준생물자원센터(ATCC), 영국표준균주센터(NCTC) 등에서 실험용으로 판매, 분양한다. 이 균주는 독소 생성량이나 생장 속도가 각각이다. 반면, 상업용 균주는 수백 번 이상의 계대 배양을 통해 독소 생산력이 극대화됐다. 상업용인 홀(Hall) A형 균주를 보유 중인 국가는 미국, 영국, 한국 등 3개국뿐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상업용 균주와 생산기술만 놓고 따지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한국 등 7개국으로 한정된다”며 “누리호가 발사에 성공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7번째 실용위성 발사 능력 보유국이 됐다. 발사체 핵심 기술인 터보펌프 기술과 개폐밸브 기술이 각각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됐다. 기술적인 위상으로 보면 같다”고 꼬집었다.
씨앗이 외래종이면 농사도 외국산? 다섯 번째 오류는 우리가 개발한 균주도, 발견한 균주도 아닌 ‘Made In U.S.A’ 균주를 한국산 균주라고 칭하는 것은 사기라는 주장이다.
보툴리눔 톡신 균주를 미국, 영국, 스웨덴 등 외국에서 분양받았다는 이유로, 이를 기반으로 한 기술과 제제를 전부 외국산이라 치부하는 주장은 문익점의 목화씨도 외국산이라고 매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업계 관계자는 “문익점이 들여온 한 줌의 씨앗은 우리 의복 문화를 바꾸고, 방직 산업을 일으켜 서민의 삶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며 “씨앗 자체는 외래종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꽃피운 기술과 산업은 전적으로 ‘Made in Korea’였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균주는 단지 생물학적 원재료”라며 “이를 어떤 방식으로 배양하고, 독소를 추출·정제하고, 안정화하는지는 온전히 해당 기업의 기술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결국 보툴리눔 톡신 제제란, 균주 자체가 아닌 그 균주가 생산한 신경독소 단백질을 어떻게 ‘의약품’으로 완성하느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보툴리눔 톡신 생산에서 고난도 단백질 분리·정제 기술, 엄격한 제조공정 관리, 열과 공기에 취약한 단백질의 안정화 기술, 효과의 지속시간과 면역원성을 조절하는 제형화 기술까지 모두 고부가가치의 전문 영역이다. 균주는 생명공학의 출발점일 뿐, 목적지는 아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더구나 한 국내 대학은 미국생물안보법(Biological Select Agents and Toxins Act, BSAT)이 제정되기 이전에, 한 과학자의 치열한 노력으로 귀중한 균주를 확보했다”며 “이는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불가능해지기 전 마지막 기회를 포착한 국가적 행운이었다. 해당 균주는 귀중한 국가 자산이 됐다”고 평가했다.
한 바이오벤처 연구소장은 “우리가 독자 개발한 기술도, 우리가 독자 발견한 균주도 아니라는 주장은, 산업기술 현실을 외면한 단견”이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항생제를 보유한 제약사는 자연에서 발견된 곰팡이 균주 하나에서 출발했고, 세계적 맥주 기업들도 특정 효모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누구도 그 기술을 ‘외국산’이라 폄훼하지 않는다”고 일침했다.
수출 막는 게 아니라 기술 유출 막는 것 마지막 오류는 국가핵심기술 지정이 균주 수출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이다.
톡신 수출업체 대표는 “이는 ‘국가핵심기술’ 지정과 ‘전략물자’를 혼돈하고 있다”며 “전략물자는 수출할 때마다 물건 하나하나를 심사하는 것이지만, 국가핵심기술은 수출 허가 시 서류심사를 꼼꼼히 하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톡신 수출에 있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 국가핵심기술 수출 절차. (제공=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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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톡신 업계 관계자는 “톡신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균주를 포함해 생산기술이 해외로 유출되지 않았다”며 “해제 주장은 기술 유출을 막을 보호막을 걷어내고, 국내 톡신 생태계를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풀자는 얘기”라며 비판했다.
톡신 수출업자는 “중국이 우리나라 톡신회사를 인수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핵심기술로 지정돼 있어서 원천적으로 인수가 불가능하다”면서 “그런데 핵심기술 해제되면 중국이 우리나라 톡신 회사 대부분 다 인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은 보툴리눔 톡신은 생물무기(Biological Weapon)로 분류해 생산, 수출, 이전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 산업 안보국은 톡신 원액 및 제조기술을 국가안보상 전략물자로 관리 중이다. 특히, 국제무기규정(ITAR, International Traffic in Arms Regulations) 및 수출관리규정(EAR, 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s)에 따라 해당 기술은 군사 및 이중용도(Dual-use) 기술로 분류돼 기술 수출 시 미국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유럽연합(EU)에서도 보툴리눔 톡신은 이중용도 수출규제(EU Dual-Use Regulation) 목록에 포함돼 있다. 독일은 생물무기협약을 근거로 보툴리눔 관련 물질 수출, 이전 시 허가제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일본은 톡신을 전략 물자로 분류하고 외국환 및 외국무역법에 근거해 철저히 수출통제를 진행하고 있다.